조광현

내일이 정월대보름이다. 이날에는 여러 가지 정감 어린 풍습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 더위팔기는 오래될수록 진한 포도주 맛처럼 그윽하게 느껴진다. 부럼 깨기와 귀밝이술을 마시고 해가 뜨기 전에 더위를 팔면 한여름에도 더위를 먹지 않는다 해서 동네를 한 바퀴 돌다 또래들이나 형 누나들을 만나면 더위를 팔았다. 이날은 새벽부터 신바람이 났다. 그 해 정월 대보름날도 동이 트자마자 더위를 팔기 위해 고샅을 돌기 시작했다.

'친구야 내 더위 다 사가!'
먼저 본 사람이 유리하므로 조심스레 동네 한 바퀴를 돌았는데도 더위를 팔지 못하고 걱정스레 집에 들어가는데 문밖에 있는 돼지우리 속의 돼지가 꿀꿀거리고 있다. 그래서 얼싸 좋구나 하고 돼지에게 가서 더위를 팔았다. 그래도 돼지는 좋다고 소리를 지르며 꼬리까지 흔들어 댄다. 마당으로 들어와서는 여물을 먹고 있는 소고삐를 잡고 더위를 팔았는데 소는 별 미동도 없이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되새김질만 한다. 두 번이나 더위를 팔았는데도 뭔가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차에 부엌에서 아버지가 나오시길래 댓바람에
" 아부지 내 더위 다 사가....." 하고는 아차 싶었다. 그때 뒤따라 나오시던 엄마가 ' 제 아버지에게 더위를 파는 저런 철없는 자식을 봤나' 하시며 어이없다는 듯 웃으시며 등을 한 대 후려치셨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지만 눈빛은 왠지 따뜻하게 느껴졌었다.

세월이 흘러 군에 간 아들이 작업을 하다 다리를 다쳐 입원을 했다. 아파하는 아들녀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안쓰럽다 못해 가슴이 저리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것이 낫겠다 싶어서다.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철부지 어린 아들이 당신에게 더위를 팔았을 때의 아버지 마음도 이와 같으셨으리라 싶다. 아들이 무더위에 고생하는 것보다 당신이 아픈 것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어이없어 그저 웃으시던 어머니의 마음도 지금은 내 마음과 같으셨을 게다. 그러다 아들을 바라보았다. 안쓰러움으로 가슴이 타는 아비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 듯 아픈 다리만 만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엄살을 떨지만 저도 언젠가 자식을 낳아 기르다 보면 부모의 마음을 진심으로 알아가는 철든 아버지가 되겠지. 그러면 제 아버지를 떠올리며 나처럼 안타까워하리라 생각하며 슬그머니 병실을 나오곤 했다.

아버지께 더위를 판 이후로는 정월대보름이 돌아와도 더위를 팔지 않았다. 어린 철부지여서 그랬을지라도 아버지에게 더위를 판 것이 늘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냥 강가를 터덜터덜 걷곤 했다. 그럴 때면 얄궂은 찬바람이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양 씨익 웃으며 어루만져 주곤 했다. 기억 속의 빛바랜 앨범을 넘기며 깊은 상념에 잠긴다. 부모님 생각에 미열 같은 통증이 인다. 부모 속에는 부처가 들어 있고 자식 속에는 앙칼이 들어 있다는 옛말이 떠오른다. 돌이켜보면 엄마는 내가 곁길로 갈 때마다 꾸중도 하시며 자잘한 사랑으로 안아 주셨지만 아버지는 내게 큰 언덕과도 같은 분이셨다. 웬만한 잘못에는 그냥 바라봐 주셨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실 때만 언급을 하셨다. 아버지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아련하고 애달픈가 보다.

오랜 비바람에 아버지 산소 봉분 옆이 허물어 저 가는 것을 볼 때마다 아버지 모습도 희미해진다. 주위에서 부모님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독백을 한다. '그래도 그런 부모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너희들은 모른다. 그 흔한 핸드폰이라도 사드리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내 심정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 세월의 무심함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옆에 계시다면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더위를 팔고 싶다.
" 아부지, 아부지 더위 내가 다 살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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